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LA 폭동 (문단 편집) === 한인 사회의 변화 === 이 폭동 사건 이후, 한인 사회에는 두 가지 변화점이 있었다. 먼저 '''[[미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미국]] [[국적]](시민권)을 취득 후 미국인으로서의 권리를 얻어 공동체의 규범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생활해야만 한다는 의식'''이 생겼다. 이전까지 한인들은 한인 공동체에서만 살았고, 경쟁 대상도 보통은 같은 한국 이민자들이었으며, [[영주권]]을 취득하는데서 멈추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이는 한국이 2중국적을 허용하지 않는 것에도 원인이 있었다. 아무리 이민자라도 본래 국적을 포기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과의 교류를 계속 하고 싶어하는 경우, 한국국적을 유지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교민들의 자손들은 2010년대 이후 한국 내에서 미국 국적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서약서를 적은 후 병역을 이행하면 복수국적 유지가 가능해지긴 했다. 참고로 이렇게 병역을 이행하는 경우 정기휴가 때 미국을 다녀오는 것을 허가해준다. 항공권도 지원해주며 휴가기간도 최소 5일 이상은 늘려준다. 물론 휴가가기 전에 서류를 복잡하게 써야 된다는 함정이 있기는 하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인사회는 개개인의 성공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미국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가'''와의 교류나, 자신들의 권리 상승을 위한 집단적인 노력에는 관심이 적었고, 이 때문에 소수 인종이지만 자신들의 권리 상승을 위해 집단적인 노력을 하고 있었던 흑인들에 비해 자신들의 권리를 더욱 주장하지 못하고 있던 실정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한인공동체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인들을 포함한 아시아인 공동체 전반에서 나타나던 경향이었다. 다만 상대적으로 정착이 오래된 중국인과 일본인들은 그래도 오랜 정착기간으로 인해 나름의 권리를 주창할 기반이 있었지만, 한인들은 그런 기반이 더욱 부족했다.] 특히 이러한 한인 공동체의 특징은 흑인 공동체의 입장에서도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는데, 수십 년간 흑인 공동체 집단이 민권운동을 통한 권리상승에 노력을 할 때마다 많은 백인들은 한인들을 이른바 사회에 잘 적응한 [[모범적 소수]] 집단으로 치켜세워주면서 흑인 공동체 집단의 민권운동을 폄하해왔고, 이 때문에 흑인 커뮤니티의 입장에서는 한인 커뮤니티의 의도와는 별개로 그들의 이러한 소극적인 경향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인 공동체의 소극적인 정치활동은 흑•백 양 쪽에서 일방적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경찰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시민권 없고 자기들끼리만 뭉치는 이민자 집단보다 일단 시민권이라도 있는 미국 시민을 보호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흑•백갈등'''이라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으로 얻어맞고 "총알막이"로서 내몰린 이후, 한인들은 '''교민들의 의견을 대변하고 권리를 지켜 줄 정치가'''의 존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경제적인 자립에만 허덕였던 수많은 한인 교포세대를 지나, 상대적으로 교육을 잘 받은 한인 2세대들을 중심으로 미국 시민권 취득과 정치활동의 참여가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서, 한인들은 지역 정가에 많은 정치 기부금을 전달하기 시작했고, 이는 미국 지역 정치인들이 한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결과로 이어졌으며, 더 나아가서는 이를 기반으로 한인 출신 정치인들이 대거 증가하는 결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한인들이 [[교포]]들만의 세상에서 탈피하여 공존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라타샤 할린스 살해사건]]조차도 방아쇠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올 만큼, 한인 사회는 주류 백인 사회와의 갈등만 아니면 관심없이 생활했다. 물론 관심이 없었던 만큼 적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주류 백인사회는 다른 소수인종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저항할 때마다 한인들을 방패막이로 이용했고, LA폭동은 한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지금까지 주류 백인사회에 의해 방패막이로 이용되고 있었음을 터득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한인사회는 이 때를 기점으로 적극적으로 다른 소수인종집단과의 인적 교류를 시작한다. 이는 한인 사회의 주류가 영어가 서툴고, 미국 사회에서 경제적 기반을 닦는 데 바빠 적응에 어려움을 겪던 기존의 1세대에서,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자라와 미국 학교를 다니면서 미국식 문화를 학습하고, 다른 소수인종과 교류를 많이한 2, 3세대로 바뀌었다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또한 이 시점 이후 들어온 새로운 한인 이민자들은 기존의 이민자들과 달리 전문직들이 많았고, 이들은 상대적으로 정치문제에 관심이 많아 한인 공동체의 정치참여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그 변화의 결과 2020년에 일어난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참고로 가해 경찰 중에는 같은 아시아계 경찰도 포함되어 있었다.] 직후에는 많은 동양인 커뮤니티가 직접 [[Black Lives Matter]]와 같은 소수인종 문제와 관련된 사회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동참해 인종간 갈등을 완화시키는 한편,[* 실제로 BLM 운동 당시 많은 아시아인 커뮤니티는 이전의 인권운동들에 비해 훨씬 많은 참여율을 보였다. 한인을 비롯한 동북아 인종 커뮤니티는 상대적으로 경찰에 의한 폭력을 덜 경험했지만, 동남아권 아시아인 커뮤니티는 경찰에 의한 폭력과 차별을 많이 경험했었기에 특히 이들의 동참이 눈에 띄게 많이 나타났다.] 일부 폭동으로 번져 혼란이 발생했을 때에는 LA 총영사관과 한인회가 나서서 LA 한인타운의 치안 유지를 위해 주 방위군 투입이 결정되었음을 알림으로써 주 방위군은 윌셔 대로의 코리아타운 주요 길목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혼란을 방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